렘 20: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성전총감독이었던 바스훌은 나라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레미야를 핍박한다. 자기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하는 상황에서 남을 때리는 격이다. 기득권에 매인 인간의 전형을 보여준다. 종교분야일지라도 기득권에는 이렇게 탐욕이 끼어든다. 주님의 영광보다 권리의 유지나 획득에 더 많은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데 앞장 섰던 유대의 산헤드린공회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겐 이런 기득권적 그늘이 없을까.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이끄심을 따라 바스훌의 이름을 마골밋사빕이라고 바꿔부른다. ‘둘러싸인 두려움’이라는 뜻이다. ‘자유’라는 뜻을 지닌 바스훌의 운명이 회개의 기회를 외면하자 ‘두려움’에 둘러 싸인 운명이 된다. 그리고는 그 이름에 따른 결말을 치루게 된다. 예수님은 갈대라는 뜻의 시몬을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로 개명시키셨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반석처럼 받치면서 제 사명을 다했다. 하나님에게는 나의 내면의 이름이 어떻게 비추어졌을까.
런던에서 중독자나 노숙자를 대상으로 하는 거리전도사역을 하면서 영어 이름을 여호수아로 정한 적이 있다. 하도 험한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어서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해지고 싶어 붙인 이름이다. 험한 상황에서 거리를 나갈 때면 끊임없이 그 이름을 되뇌였고 마음을 간수하려 애썼다. 이름은 그 뜻에 부응하는 어떤 유익을 주는거 같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름을 바꾸게하신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호적의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이름이다. 그 이름이야말로 주님이 알고 있는 진짜 이름이기 때문이다.
* 주님, 주께서 주신 이름과 사명을 통해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소망합니다.